(1)
마림국은 오늘 아프리카로 불리는 곳에 위치한 국가이다. 사서의 기재를 분석해 보면 이번에 마림국에서 명나라에 조공한 ‘기린’은 사실 지금도아프리카에서여전히흔하게볼수있는동물인기린(長頸鹿)이다.
기린은 머리에 뿌리가 나고 몸에 꽃무늬가 그려져 있으며 용의 머리,돼지 입이어서 중국 고서에 기재된 기린과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중국고서에서말하는신수(神獸) 기린이아니었다.
전설로전해지고있는신수기린은현실에존재하지않았다. 견식이있는글쟁이라면누구나다알고있는일이니, 영락제주체는더말할것도없었다. 옛책에서기린은태평성세때에만세상에모습을나타낸다고하였다. 마린국의이같은처사는우연인지아니면의도된것인지알수없었지만 필경 ‘황상성명(皇上聖明)’의 가장 직접적 증명이었기에 영락제의마음에꼭들었다.
영락제는 기분이 매우 좋았지만 대신들이 축하하면 짐짓 받아들이지않는체하였다.
영락제는 겸허함을 표시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공된것이 신수 기린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뻔뻔하게 받아들인다면학식이있는대신들이속으로그를비웃을것이며, 황제의현명함이얼룩가기에그래도신중하게행동하는것이좋다고판단하였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기린’이 수도에 운송되어 오자 영락제는 친히 봉천문(奉天門)까지나가마중하였고성대한접수의식을진행하였다.
영락제는 오랫동안 건문제의 행적을 여러모로 찾았지만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불안했던 마음을 점차 놓게 되었다. 한편, 정화의 해양원정은함대규모가 방대하고 경비도 상당했으며, 방문하는 나라의 국왕과 주요대신들에게 선물을 대량 하사했기에 경제적으로 부담이 매우 컸다. 그리하여 원정은 불필요한 지출이 되었고 영락제는 최대한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마림국에서‘기린’을 보내와 영락제는 해양원정의 장거를 그만 둘 수가 없게 되었다. ‘기린외교’가 명나라 초기의 대외방침이 초보적으로실현된중대한사건으로받아들여졌기때문이다. 마림국은멀리동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여서 명나라 사람들은 그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극지지국(極地之國)’에서까지 중국이라는 천조대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으니, 명나라가 강성하고 번창함을 증명하였으며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끌고있음을설명하였다.
영락제는 하는 수 없이 정화를 다시 원정에 파견하여 명나라가 여러나라와의우호적내왕을중시하고있음을표시하였다.
영락 14년, 귀국한지얼마안된정화는다시황제의명을받들고원정의 길에 올랐다. 정화는 원정을 본인이 한평생 노력하고 추구해야 할 사업으로여겼기에원정을명한성지를받들고매우기뻐하였다. 그러나계절풍이 이미 지나갔기에 이듬해 가을에 태평양 계절풍이 불어올 때쯤 출항하기로결정하였다.
(2)
정화가 다섯 번째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중국에는 명성조 주체가 수도를북경(北京)에옮기는중대한사건이발생하였다.
영락 14년(1416) 가을, 영락제는북경에가서현지고찰을마친후남경에 돌아와 수도를 그곳에 옮겨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대규모적인이전공사가시작되었다.
북경은 원래 원나라의 수도였고 대도(大都)라고 불렸다. 영락제는 원나라 대도를 기반으로 대규모적으로 개축하고 증축하였다. 신축한 궁전에진귀한 보물을 많이 진열하고 궁성의 정원에는 진귀한 조수들을 대량 채워 넣어야 하였다. 어떤 것은 국내에서는 얻기 힘들었기에 정화가 재차원정하여 ‘바다에서 보물을 찾아와’ 세계 각국의 보물로 신축 궁전이 이채를띠게해야하였다.
한편, 궁전에서 필요한 보물이 외국에서도 반드시 보물이여야 한다는법이 없었고 얻기도 별로 힘들지 않았으며 명나라 정부에 바치면 그 이상을 보상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강대함과 부유함을 과시하기위해외교상‘받은것보다더많이보내는’ 정책을실시하였다.
그 기간 명나라에 많은 외국손님이 찾아왔다. 정화의 4회 원정으로 명나라는 동남아, 서아시아, 동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이 나날이 커졌다. 방문갔던 나라들은 늘 사절단을 파견해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보르네오국과말라카국 국왕이 명나라를 방문한 데 이어 술루왕국 국왕들도 명나라를방문하였다. 술루왕국은지금의칼리만탄섬과필리핀제도사이에위치하였고그당시봉건사회성질을띤군주제국가였으며, 세왕이병립하였다.
명나라는술루국귀빈의방문을매우중시하였고성대하게환대하였다.그들이 북경에 도착한지 며칠 안 되어 영락제는 조서를 내려 세 국왕을동왕, 서왕, 국왕으로 각각 봉하고 고명(誥命), 인장(印章), 관복(冠服), 의장(儀仗) 등을하사하였다.
이번의 하사와 책봉을 통해 술루국의 세 왕은 명분이 정식으로 확정되었고술루국과명나라의관계는보다밀접해졌다.
정화가 명을 받들고 다섯 번째 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자바, 말라카를 포함한 18국과 바렌반국 선위사의 사신들이 귀국하려 하였다. 영락제는 정화에게 다섯 번째 원정을 명하여 귀국하려는 상기 나라 사절들을호송하게하였다.
정화는 다섯 번째 원정을시작하여 영락 17년(1419) 7월이되어서야 중국에 돌아왔다. 이번 원정에서 정화는 줄곧 수도 이전과 마림국에서 ‘기린’을 조공한 것이 영락제에게 주는 영향을 염두에 두고, 방문하는 나라마다영락제는중국에없는기이한동물을좋아한다고암시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나라는 너도나도 사신을 파견하였고, 정화함대와 함께중국에 가서 황제에게 다양한 희귀동물을 조공하였으며, 호르무즈 사자,캘리컷사불상(四不象), 말라카코뿔소등이포함되었다.
정화가 여러 나라의 사신을 거느리고 영락제에게 다양한 희귀짐승을바칠 때, 대신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영락제에게 축하를 보내느라정신이없었다.
이 밖에 정화는 다섯 번째 원정에서 코친국에 비석을 세워 주고 사적(史績)을기록해야하였다.
코친국은 동쪽으로 큰 산을 등에 지고 있고, 서쪽으로 해양에 임해 있으며, 북남 쪽이 근해인 고대 인도반도의 중요한 상업항구이다. 영락 연간에 중국과 코친국의 우호관계는 매우 크게 발전하였고, 코친국은 연속 2년동안사신을파견해명나라에조공하였다.
영락 9년, 정화가코친국을재방문했을때사신은인고를하사해줄것을청구하면서코친국의큰산에새겨영원히기념하겠다고하였다. 그리하여 영락제는 정화의 네 번째 원정을 빌어 국왕 가역리(可亦里)에게 인고를 정식 하사해 코친국 국왕으로 봉하였고 그 큰 산을 진국(鎭國)산이라고이름을지었다.
정화는 다섯 번째 원정에서 황제의 명을 받고 또다시 코친국을 방문하여 진국산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영락제 주체가 직접 썼다. 그러나 아쉽게도비석은지금까지발견되지않고있다. 그러나비문의내용은다양한 중국 역사책에 기재되어 정화의 다섯 번째 원정을 증명하는 진귀한역사문헌으로되어있다.
免责声明:以上内容源自网络,版权归原作者所有,如有侵犯您的原创版权请告知,我们将尽快删除相关内容。